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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ction1- 응답하라

 



#1.


  “헤어져.”

 순간 나는 그녀가 유행하는 한 개그프로의 유행어를 흉내 낸 줄 알았다. 간만에 얻은 휴가에 쏜살같이 여자 친구의 집 근처 까페로 찾아온 나에게 다짜고짜 헤어지더니. 나는 헛웃음을 쳤지만, 그녀는 웃지 않고 있었다. 진심으로, 나에게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왜냐고 물으니, 번번이 자신의 연락을 ‘씹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단다. 두 달간 하루도 바닥에 등을 맞대고 잔 적이 없는 드라마 조연출인 내가 어떻게 매번 연락을 받을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응. 알아.” 그녀는 여전히 냉랭한 표정이었다. “아는데, 이제는 이해하기 싫어.” 그녀는 이제 늘 연락하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평범한 남자를 만나고 싶단다. 정말 오랜만에 생긴 일주일의 휴가는, 이렇듯 잔인한 스타트를 끊었다.



#2.


 그렇게 허탈하게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집에 오는 길은 슬프기보다 멍했다. 두 달간 그 바쁜 촬영 중에도 나는 온통 그녀 생각, 그녀에 대한 그리움뿐이었다. 전화조차 받지 못하며 그녀를 그리워하며 일했던 그 시간들은, 여자 친구에겐 정반대로 나를 지워가는 시간이었다. 의도치 않았던, 나의 침묵들은 그녀에게 '무관심‘이라는 응답으로 발송되었나 보다.

  ‘이제 어쩌지.’ 그녀는 이미, 그리고 천천히 나를 지웠지만 내 마음은 오롯이 그대로였다. 그녀와의 행복한 일주일을 그렸던 이번 휴가를 이제는 사랑했던 사람을 잊는 일로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문득 억울하게 느껴졌다. 한 칸짜리 자취방에 틀어박혔다가는 심장이 답답해 터질 것 같았다. 발길을 돌려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멍하니 어둑어둑한 밤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나는 7년 전 사귀었던 첫사랑 그녀와 헤어진 가로수길 한 가운데에 서있었다.



#3.


“대답해! 안 그럼 정말 너랑 나랑 끝이야!”

 7년 전 첫사랑과 헤어지던 그 날,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말과 함께 발길을 돌리던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외친 말이었다. 친한 남자 후배와 그녀의 묘한 분위기를 의심했던 나는 그녀의 강한 부정이 필요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려, 어깨 너머로 잠시 나를 쓸쓸히 바라보곤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때는 그녀의 침묵은 나는 내 의심에 대한 수긍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뒤늦게야 내 의심이 오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침묵의 의미를 깨달았다. - ‘나를 사랑하지만, 나를 믿지 못하는 연인에 대한 깊은 실망.’ - 그것이 그녀의 쓸쓸한 눈길의 의미였다. 그리고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을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은, 일종의 마지막 예의이자 배려였다.



#4.


 여자 친구와 헤어진 지 세 달이 지났다. 나는 이미 새로운 작품의 조연출로, 그리고 여전히 하루에 두 시간도 눈을 붙이지 못하는 가혹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야간에 야외촬영까지 겹쳐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헤어진 여자친구의 전화가 걸려왔다.

  “어, 어쩐 일이야.” “오빠.. 미안해...” “...” “내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아...오빠... 정말 미안해. 오빠 정말 좋은 사람인데... 너무 바쁜 사람인 거 아는데... 내가 정말 바보같이 생각했었어...” 갑자기 머리가 띵해졌다. “야, 신피디! 너 이 자식아 거기서 멍 때리고 자빠져있으면 어떻게!” 피디님이 멀찍이서 벼락같이 소리를 쳤다. “혜연아, 오빠 지금 너무 바쁘다. 끊자. 미안해.”

 나는 다시 소품실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의 마지막 응답을 어떻게 이해할까. 아마도 ‘나는 이미 너를 잊었다.’ 이려나. 당장은 그렇게 오해하더라도, 언젠가 그녀도 내 응답의 의미를 이해하는 날이 올 것이다. 마지막 내 응답은 사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어 너무 힘이지만, 너를 아껴줄 수 없고, 그런 능력도 여유도 없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그렇게 대답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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