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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토크-2012년 6월 3일

 

 19세 즈음의 배준용이 가졌던 삶의 키워드는 '정의' 였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허세가 놓여있었다. 세상은 단순했고, 힘을 가지고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삶의 중심에 놓여있었다. 그리하여 이름을 알리고 역사에 길이 남는 방식의 '영생'으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해보려 했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오면서, 세상과 인생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역사를 통해 이름을 남기는 방식의 영생이라는 것도 허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이어 사춘기-오춘기-육춘기 스트레이트로 보냈지만, 내 키워드가 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행복' 인 것 같기도 했고, '사랑'인 것 같기도 했고, '욕망'인 것 같기도 했고, '허세'인 것 같기도 했다. 여전히 정의로움도 중요한 것 같기도 했다. 암튼 전혀 종잡지 못했다. 어쩌면 더 이상 내 인생의 키워드는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27세 즈음의 배준용은 불현 듯, 자신이 가진 삶의 지향은 결국 '자유'로 수렴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 형식적인 자유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 를 갈망하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 많았으면 한다. 하지만 비교적 소박한 것들을 만족시켜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것 같다. 반듯한 직장이 있었으면 좋겠다. 때갈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부모님의 쓸떼없는(지금의 나에게는...) 근심을 덜어드리고, 본인이 하고 싶은 바를 넓혀줄 수 있는 직장을 갈망한다.


 생각해보면, 자유는 내가 사람을 좋아하는 기준인 것 같기도 하다.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모두 좋아한다. 어떤 방식으로도 이미 자유로운 사람은, 나에게 모범이고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 이상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본인의 삶도 자유롭기를 갈망하며, 더불어 타인의 삶도 자유로워지는 데 힘을 보태는 사람들이다. 내가 속한,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찌질한 무리'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삶을 늘 고민하고, 그러면서도 타인의 자유를 깨트리지 않으려 조심하려는 사람들이 바로 찌질이들 아닐까. 

 반대로 내가 싫어하는 이들은 자유를 포기하는 자, 자유를 적대시 하는 자들이다. 물질적 기반에 그저 만족하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자유도 기꺼이 타인에게 헌납한다. 그리하여 공허해진 마음들을 퇴폐적으로나 속물적으로 해소하면서 살아가는 인간들. 혹은 타인의 자유를 부당하게 침해하고, 그것을 속물적인 기준으로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기로 했다. 인간은 모두 자유로울 자격과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를 적으로 삼거나, 포기한다면 그것은 애정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내가 감당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불현듯, 자유 역시 내 삶의 전부를 포괄하지는 못하는 듯 하다. 하지만, 27세 즈음의 배준용, 살짝 미친 것 같은 이 인간의 많은 부분은 '자유'라는 단어로 설명가능 한 것 같다. 나는 자유롭고 싶다. 자유롭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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