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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지오,'의심하는 도마'를 보고.

부제: 의심하는 인간이 자유로운 인간이다.


1. '돌+아이', 카라바지오.


 

    의심하는 도마(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카라바지오,1602년, 유화, 107*146cm


 필자를 잘 아는 지인들이 이 글을 보면 꽤 놀랄지도 모르겠다. 아마 대부분 내가 그림에 관심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리라. 물론 직감하겠지만 필자가 그림에 깊은 관심과 조예가 있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미술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사실 이 글을 읽는 몇몇 분들이 필자의 미술에 대한 허접한 배경지식을 간파할까봐 겁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 조금의 관심만 가져도 미술은 충분히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예술이라는 점을 공유하고 싶었다. 조금 더 욕심내자면, 이 그림과 이 그림을 그린 화가, 많은 분들이 좋아해줬으면 한다.

 위 그림은 1601년에서 1602년 사이에 그려진 카라바지오의 작품 ‘의심하는 도마’이다. 이 그림을 그린 카라바지오는 1571년에 태어나 39살의 짧은 인생을 이태리 반도에서 살았던 화가다. 본명은 ‘미켈란젤로’였으나, 그보다 더 유명한 르네상스 화가 미켈란젤로와 구분하기 위해 그의 출신지인 카라바지오가 그의 별명이자 이름으로 굳혀졌다.

 그는 소위 ‘미친 놈’이었다. 17세기 역사가들은 한결같이 그를 ‘극도로 이상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다혈질에, 폭력적이고 언행은 상스러웠고, 자유분방하며 수많은 범죄에 연루된 인물이다. 말 그대로 ‘돌+아이’이였지만, ‘야인’과 ‘자유인’으로서의 면모도 강했던,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인물이다. 창조는 돌연변이로부터 시작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또라이’로 불리던 카라바지오는, 오늘날 미술사가들에게는 르네상스 회화를 넘어서는 바로크 회화의 창시자로 불리는 뛰어난 화가로 재조명 받고 있다. (그러니 주변에 있는 '또라이‘들을 조금은 관대하게 봐주도록 하자.)

 ‘의심하는 도마’는 이렇듯 뛰어난 화가이자 자유인(?)이었던 카라바지오의 화풍이 잘 들어나는 그림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더불어, 그림 자체만 봐도 굉장히 흥미로운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보기만 해도 흥미로운 구석이 있지만, 좀 더 알고보면 더더욱 재미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카라바지오라는 자유인이 품고 있었던 혁신과 자유로움, 재기발랄함이 잔뜩 묻어있다.


2. 성화(聖畵)이긴 한데...?

 그의 그림이 가진 혁신성을 이해하려면, 그가 살았던 당대의 그림들이 어떠하였는지를 조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언급했듯이 카라바지오가 살았던 17세기 초 이탈리아는 당시 유럽회화의 중심지로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이 그 틀을 완성한 ‘르네상스 회화’가 번성하고 있었다. 르네상스 회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다 빈치의 그림을 보면 르네상스 회화의 특징을 대표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 빈치가 그린 ‘수태고지’라는 그림이다. 천사 미카엘이 성모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했음을 알려주는 성경의 한 구절을 묘사한 성화(聖畵)다. 그림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우선 다 빈치는 원근법을 혁신적으로 적용한 인물이다. 배경을 보면 그림의 한 점을 중심으로 굉장히 정확한 비례로 원근이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중세 서적에 나와있은 수태고지 성화이다. 미카엘과 성모마리아가 평면적으로 그려지고 있고, 자세나 신체의 비율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세회화의 전형적인 특징을 가진 그림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다 빈치의 그림을 보면 등장인물의 신체적 비례나 자세 등이 훨씬 사실적으로 묘사했음을 알 수 있다. 보다 사실적이고, 보다 우아한 회화적 혁신을 다빈치는 이룩했던 것이다.

 당시 대다수의 화가들이 다 빈치를 비롯한 ‘르네상스 3대 거장’들이 미술을 완성시켰다고 믿었다. 그래서 미술가의 소명은, 그들의 미술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카라바지오는 그렇게 믿지 않은 것 같다. 절대적 권위를 가진 미술가들와는 다른, 새로운 시도를 구사한다. 물론 보시다시피 ‘의심하는 도마’ 역시 종교적 소재를 다룬, 성화이기는 하다. 예수의 부활 직후, 이를 믿지 못하는 예수의 제자 도마가 예수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고는 부활을 믿게 되었다는 요한복음의 한 구절을 묘사한 그림이다. 하지만 기존의 성화들과는 분명 다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면서, 충격적인 것은 도마가 예수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 확인하는 모습이다. 다 빈치는 중세회화를 벗어나 르네상스회화를 개척해냈다. 하지만 여전히 중세에 흔하게 다루었던 성화를 계속해서 그렸다는 점, 성화 속 인물들을 우아하고 신성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는 중세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카라바지오의 성화를 보면, 우아함과 신성함을 찾기 힘들다. 오히려 성화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법한 일인냥 묘사하고 있다. 제자에게 상처에 손을 넣도록 허락하는 예수의 모습에서는, 심지어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마저 느껴진다. 카라바지오의 천재성은 여기에서 빛을 발한다. 감히 그 누가 신성한 예수의 상처에 손을 집어넣어 볼 상상이라도 해봤을까? 만약 당신이 이 장면을 그림으로 묘사해주길 부탁받았다면, 당신은 이러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르네상스의 거장들처럼 카라바지오 역시 성화를 그렸지만, 그의 성화에는 기존의 신성함과 고귀함, 우아함은 찾아볼 수 없다. 극적인 리얼리티만이 부각될 뿐이다.

 ‘의심하는 도마’의 예수는 이렇듯 너무 현실적으로 묘사되어, 비권위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상처에 다른 이의 손이 들어갔음에도 고통도 불쾌감도 찾아볼 수 없는 무덤덤한 예수의 표정에서 우리는 극도의 신성함을 느낄 수 있다.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한 예수의 반응은 오히려 너무나 인간적이고 정상적이지 않기에, 그는 ‘우리 앞에 나타난 신’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마치 사진으로 찍은 것 같은 카라바지오의 생생한 묘사력이 더해져서, 예수의 신성함은 마치 눈앞에서 펼쳐지는 느낌까지 받게 된다.

 카라바지오가 미치광이 화가로 불리면서도 교황과 교회로부터 성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 아니었을까. 예수와 예수의 신성함을 마치 눈앞에서 직접 보는 듯한 생생함으로 표현했기에, 그의 성화는 교회와 신도로부터 늘 환영받고 인기를 누렸으리라. 실제로 카라바지오는 여러 ‘비운의 천재’들과 달리, 높은 유명세를 얻으면서 살아왔다. 이런 눈부신 실력 덕분에.


3. 어둠이 빛을 밝히다.

 카라바지오의 또 다른 천재성은 배경과 빛의 사용에서 드러난다. 기존의 회화들은 배경의 사실적 묘사와 빛의 효과에 무관심했었거나(중세), 야외를 중심으로 하는 원근법과 빛의 묘사에 초점을 맞추었었다.(르네상스 시기). 반면 카라바지오는 인물들을 어두컴컴한 실내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조그마하지만, 그림 속에는 보이지는 않는 창(窓 )을 내고 그 창을 통해 한 줄기 빛을 그림 속에 비춘다. ‘의심하는 도마’를 보면 어두운 배경에 11시 방향으로 한 줄기 작은 빛이 들어오는 장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두운 배경과 작은 빛이 섞이자 그림에서 밝고 어두운 부분이 극적으로 대비되는 효과가 나타난다. 환한 예수의 어깨와 대비되는 옆구리 상처의 어두움, 그림의 맨 위에 있는 제자의 빛나는 대머리와 대조되어 어둠 속에 서있는 한 제자의 모습, 도마의 왼쪽 어깨와 팔이 밝게 드러난 것과 달리 그의 몸은 대체로 짙은 어둠에 놓여있는 모습에서 우리는 극적인 명암의 대비를 알 수 있다.

 명암의 극적인 대비는 인물들의 입체감을 부가시킨다. 도마의 환한 왼쪽 어깨는 마치 그림을 뚫고 나오는 것과 같은 입체감을 준다. 그림 맨 위 제자의 빛나는 대머리는 예수의 옆에 서는 바람에 빛을 받지 못하는 그림 오른편의 제자와 대비되면서, 맨 위에 있는 인물이 우리와 가장 '멀리' 떨어져있다고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어두움과 작은 빛을 활용하기 위해 인물들을 어두운 배경으로 끌어들이고, 명암의 대비를 강조해 입체감과 리얼리티를 극대화한 카라바지오의 구상은 천재적이라는 생각을 절로 들게 한다. 사진과 명암대비에 익숙한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쩌면 당연해보일 수 있지만, 카라바지오 이전의 회화에서는 찾기 힘든 시도다.


4. 감히, 신을 의심하다; 의심하기에 인간이고, 자유롭다.

 회화적인 측면에서도 감탄할 지점이 많지만, 무엇보다도 이 그림에서 진정한 르네상스 정신을 목격하게 된다는 점이 가장 감탄스러운 부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르네상스가 무엇인가. 신 중심의 중세로부터 탈피해 인간을 조명하고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인본주의(Humanism)와 근대성(Modernity)의 출발점이 아닌가. 하지만 예술의 르네상스를 가져온 다 빈치를 비롯한 르네상스 미술가은 여전히 성화를 그리고, 성화 속의 신들이 가진 신성함과 고귀함을 드러내는 것에 메여 있었다는 점에서 중세적이었다. 이는 르네상스 시기 였으나 여전히 바티칸 교황과 교회세력이 강력한 권력과 권위를 누리고 있던 당시의 시대적 한계라고도 말할 수 있다. 카라바지오도 이러한 비판에서 아주 자유롭지만은 않다. 그 역시 현실감 있는 성화로 신의 성스러움을 부각시키는 작업을 했다는 점에서, 교황과 교회의 위세로부터 결코 자유로운 인간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가 이러한 성화로 큰 인기와 명성을 누렸다는 점에서도 그 당시 새로운 시대정신을 발휘한 인물이라고 말하기에는 난감한 점이 있다. 그러나, ‘의심하는 도마’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카라바지오가 도마를 통해 교회와 신이 누렸던 '중세적인 권위'를 무참히 끌어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성경에 나오는 장면이기는 하지만, 한 인간이 신의 부활을 의심하여 상처에 손까지 넣어보는 이 생생한 장면에서 우리는 ‘신을 의심하는 한 인간’을 바라보게 된다. 여기에서, ‘감히 손도 대지 못할 고귀한 존재로서의’ 신, 중세를 지배하던 그 고귀한 신은 사라진다. 한마디로, 중세의 종말이다. 이 그림에는 그저, '지극히 인간적이기에 신성한' 신의 모습이 있을 따름이다. 그림 속의 신은 교회와 주교와 교황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한 절대자가 아닌, 우리 곁에 있는 지극히 인간적 존재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카라바지오는 휴머니스트다. 카라바지오는 '의심하는 도마'를 신의 인간적인 면모와 신의 신성함이 모순되어 보이게 구성함으로써, 당대 교회와 종교의 권력과 위세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메시지를 담아내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시대정신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고 있지만, 현실의 권력과 권위는 여전히 종교가 압도하고 있었던 격동과 혼란의 시기에 한 예술가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천재적이고 현실적인 구성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카라바지오의 혁신성과 자유인으로서의 풍모는 의심이라는 행위를 그림의 중심소재로 다루었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권력은 강제력이 뒷받침 되지만, 권위는 자발적이다. 그래서 권위는 늘 믿음을 전제한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늘 바람직하고, 정당하며, 뛰어나며, 그렇기에 절대적인 것으로 믿을 때 권위는 유지될 수 있다. 권위는 권력과 합쳐지게 되고, 사람들의 믿음은 예속과 맹종으로 변하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늘 필요한 것이 바로 '의심'이다. 의심에서 출발한 비판과 견제가 바로 부당한 권위를 깨트리는 시작점이 아닌가. 바티칸 교황과 종교의 권위가 여전히 공고하던 그 당시, 기독교의 정점에 서있는 예수라는 존재를 손가락까지 넣어가며 의심하는 도마를 보고 있으면 권위에 주눅들지 않는 카라바지오의 대범함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권위에 주눅들지 않는 자유로움이 바로 근대, 즉 인간이 세상의 중심임을 외치게 되는 새로운 시대를 연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르네상스에서 시작된 '근대(Modernity)'는 정말로 인간이 중심이 되고, 인간이 자유로운 시대인가? 오늘날 근대의 대표적 산물로 간주되는 자본주의와 시장, 국가와 민족은 중세의 종교와는 달리 권위적이지 않은가? 이들은 진정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의심하는 도마'라는 그림은 이렇게 답하는 듯 하다.; '의심하라. 의심하기 때문에 인간이며, 의심할 때 비로소 인간은 자유롭다.' 


<참고문헌>

E.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p.s 잘못된 사실관계나 견해가 있으면 지적해주세요.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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