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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 2




1


소방관이 되려면 눈이 좋아야 한다며 태정이는 라섹을 하겠다고 했다. 슬슬 쌀쌀해지고 있던 초겨울이었는데, 혼자 수술을 받으러 가겠다고 몇 번 말했다. 기말이 끝나는 즈음이었던 것 같다. 나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태정이랑 같이 강남역으로 갔다. 어느 불편한 귀퉁이에서 담배를 한 대 피웠다. 현영이는 강남역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었다. 수업을 마친 현영이를 만나 철판 오코노미야끼 집에 들어갔다. 강남역에서 이렇게 셋이 밥을 먹는 것도 어색했는데, 더구나 맛도 없었다. 예전에는 강남역만 가면 늘 그런 식이었다. 


밥을 먹고 시간이 조금 남아서, 썬글라스를 사러 갔다. 수술을 받고 얼마 동안은 빛을 봐서는 안 된다나. 안경원에서 비싸게 주고 살 필요 없다며 올리브영 내지 왓슨 같은 곳에 태정이를 끌고 들어갔다. 완전 싼 값에 그럴 듯한 썬글라스를 산 태정이는 함빡 웃었다. 


안과로 가는 지하철 보도에서 비니를 팔고 있었다. 우리들은 이것저것 헤집어가며 머리에 쓰고 탈탈댔지만 결국 빈 손으로 나왔다. 왜 이렇게 예쁜 비니가 없어, 했다. 


태정이는 조금의 두려움과 조금의 조심스러움으로 진료를 접수했다. 살살 움츠러 든 뒷모습이었다. 아마 가방 속에 있는 현금 다발 때문이었을 것이다. 


태정이가 수술을 받는 동안 현영이랑 대기 의자에 앉아있었다. 꽤 어색해서 선물용 립스틱에 대해서 일부러 묻곤 했는데, 현영이는 별로 아는 게 없었다. 그냥 여성 잡지를 뒤져가며 립스틱 브랜드와 상품코드, 미묘한 색감들을 휴대폰 메모창에 써내려 갔다. 디올이니, 랑꼼이니, 루쥬, 루즈, 알뤼르벨벳 따위를 뭔지도 모르면서 바보처럼 베끼고 있는데 태정이가 밖으로 스르르 나왔다. 


태정이는 앞이 잘 안 보인다고 했다. 팔을 끌고 질질질 나가서 택시를 타려고 했다. 택시를 타려면 지하보도를 건너가야 했는데 또 다른 비니 가게가 있었다. 조만간 방울비니를 사겠다고 맘먹고 있었으므로 또 들어가서 머리에 쓰고 탈탈댔다. 그러다 네이비색이랑 하늘색이랑 하얀색이 예쁘게 배색된 비니를 발견했다. (지금도 내가 아끼는 방울 비니다.) 그 날 입고있던 네이비색 더플코트랑 색이 착 어울리는 비니였다. 태정이는 시뻘건 비니를 휘휘 돌리며 레버쿠젠 비니를 발견했다고 좋아했다. 고민하는 태정이를 독촉해 둘다 비니를 손에 들고 가게를 나섰다. 


택시를 탔는데, 태정이가 이렇게 시원하게 돈을 쓰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태정이는 몇 분이 지날 때마다 눈에 인공눈물을 집어넣곤 했다. 나랑 현영이는 알람시계처럼 인공눈물을 넣어야 할 시간이 되면 알맞게 말해줬다.  


한참을 달려 낙성대쯤에 이르렀다. 아저씨는 입구역이 많이 막힐 거라며 학교를 관통하기로 맘먹었다. 후문을 지나 기숙사 삼거리 오르막을 오르는데, 학교에 오랜만에 온 기분이 무척이나 설레게 느껴졌다. 


야, 우리 대운동장에서 내렸다 가자.


대운동장, 대운동장에 내려 담배를 피웠다. 참으로 겨울 오후였다. 해는 없고, 잿빛이었고, 파랬다. 사진을 찍고 싶었다. 대운동장 뒷쪽 걷고싶은 거리를 지나가는 커플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이 바위에 올라가서 이런 각도로 찍어주세요, 라고 정확히 지시했다. 우리도 어떤어떤 느낌으로 찍자고 작당했다. 뭐라고 했는지 기억은 안 난다. 사진을 찍고나서는 감사하다고 말했다.  저 사람이 보면, 무슨 서울대 관광온 사람 같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 상황이 너무 우스웠다. 


담배를 피고 나면 언제나 그러듯 동원관 화장실에 들어가서 손을 씻었다. 손이 많이 시렸다. 태정이 썬글라스에 내 얼굴이 너무 선명하게 비쳐서, 썬글라스 앞에서 재롱을 피웠다. 태정이는 하지 말라고 푸더덕 거렸지만,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태정이 방까지 걸었다. 많이 어둑어둑해졌었다. 


태정이 방에서 같이 저녁을 먹었다. 누가 또 왔던 것 같은데 어떤 친구였는지, 우리는 또 한참이나 떠들어댔는데 어떤 말들이었는지, 뭘 이것저것 사와서 먹었던 것 같은데 어떤 음식이었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쓸 데 없는 것들이었을 거다.











2



아주 맛있는 저녁이었고, 나는 빨강이었고, 너는 오렌지였다. 벤치에 앉아있는 시간이 너무 아쉬웠다. 다음 날 회사면접이라고 일찍 집에 보내놓고는, 기타를 쳤다. 동네 카페에 앉아서 벼락치기도 해봤지만 잠깐 뿐이고, 나는 또 방에서 기타를 치고 있었다. 


기타를 맘가는 대로 막막 치다가, 예쁜 소리가 나는 코드들을 하나씩 하나씩 이어붙였다. 이어붙이고 쪼개고 나누고 재미있는 장난들을 집어넣고 하다보니 어느새 노래가 되었다. 새벽 네 시쯤이었을 거다. 잠이고, 면접이고, 모두 다 날아간 그 새벽에 나는 완전히 푸욱 빠져있었다.


밤새고 면접을 보았고, 스스로 놀랍게도 면접은 성공적이었다. 하루종일 눈을 부릅뜨려고 얼마나 노력했던지.


반은 직장인 같은 마음으로, 반은 학생 같은 마음으로 살던 때였다. 며칠 후, 임상심리학 수업노트에 노랫말만 끄적여댔다. 그땐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적당히 노래도 만들어지고 노랫말도 만들어진 그 날 저녁에 밥을 먹고는 기타를 들고 학교에 다시 갔다. 사연당 동아리방은 조용했다. 엠피쓰리를 켜놓고 연주를 하고 노래를 했다. 지금 기억으로는 열 번도 넘게 했던 것 같다. 박자가 심하게 어긋나기도 하고, 삑사리가 삑삑거리기도 하고, 템포가 마음에 안 들기도 하고. 나중에 마음에 들어봤자 또 다시 들어보면 아닐텐데. 지금도 별로 아닌데.


그렇게 노래를 만들었다. 


그 때 그렇게 너와 노래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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