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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 3





    시리즈물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녀석을 묻는다면 일말의 여지 없이 007 시리즈를 꼽을 수 있다. 가장 많이 봤던 시리즈물이기도 하지만 가장 처음 본 시리즈물이었다. 어릴 적 즐거움 중 하나는 주말에 아빠가 빌려온 비디오를 같이 보는 것이었고, 대개 이연걸, 성룡, 007 류의 영화가 주를 이루었다.  007시리즈와 성룡, 이연걸과의 가장 큰 차이는 본드걸의 유무였고, 정확히는 키스신 (또는 그 이상의) 유무였다. 007만 틀면 파블로프의 개가 된 듯 소파에 앉아 키스씬을 기다리곤 했다. 


    그럼에도, 겉보기에 나는 정절관념으로 가득 찬 '올바른' 꼬마였다. 절대 여자친구도 만들지 않을 것이고 결혼도 하지 않을 거라고 걸핏하면 가족들에게 선언하곤 했다. 좋아하는 여자애와 짝꿍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던 마음은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학교에서 여자애랑 말하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물론 나도 무지하게 여자애들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마음 속 옹알이에 그치곤 했다. 여자애들이 먼저 말을 걸어올 때에만 대화가 성립되었다. 돌이켜보면, 그 대화를 보는 주변인들이 나를 여자나 좋아하는 속물로 보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것 같다. (아니, '돌이키다' 라는 단어가 부적절할 정도로 지금도 조금은 똑같은 눈치를 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치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처럼, 그러한 정절의 '매너모드' 속에서도 여전히 '미지의 끌림'에 대한 갈망은 커져갔다. 학교에서 여자애들이 말을 걸어올 때마다 심장은 바운스 바운스 두근댔고,  이웃모임이 있는 거실에서도 시선은 주말 영화의 매혹적인 여주인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백컨대 가장 거대한 갈망의 대상은 이모였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이모는 결혼하기 전까지 우리 집에서 방을 하나 얻어 살고 있었다. 꼬마에겐 가장 성숙하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누굴 가장 좋아하냐는 짓궂은 어른들의 질문에, 항상 엄마가 2등, 이모가 1등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순위 차트는 장르를 구분하여 선정될 필요가 있었다. 지금도 또렷히 기억나는 어느날 밤, 이모 곁에서 잠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엉큼한 짓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무언가에 매혹된 순수한 정념이었다. 십수번을 고민하다 잠이 들었고, 꿈에서는 이모의 곁에 누웠던 기억이 난다. 


    이 모든 일들이 7살 전후에 일어났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 때에는 성(性)의 개념조차 없었다. 말 그대로 '미지'의 성욕을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럽고 빨리 느끼게 된 걸까? 그럼에도, 왜 '정절'을 표방하며 근 20년간 쑥맥 아닌 쑥맥으로 살아야만 했을까? 


    언어영역 문제에는 언제나 지문에 정답의 근거가 있다고 배웠고, 이러한 개인적 특질들의 단서도 어딘가 사소한 유년경험에 있다고 믿고 있다. 어릴 적 좋아했던 치타와 같은 맹수들로부터 공격성을 내재했듯, 굳건했던 정절관념은 수많았던 위인전의 영향으로 판단한다. 나는 어릴 적 정말로 많은 위인전을 읽었다.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위인전을 낭독하는 건 나만 아는 즐거움이었다.


    여자와 술을 가까이 하는 위인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없었다. 자고로 술과 여자를 멀리 해야 올바른 선비, 그리고 위인이 될 수 있었다. 그래, 나는 20년간 선비였다. 위인전 이야기 기저에 알알히 박혀있던 유교관념들은 여자애에게 향하는 내 어깨를 꽉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세종대왕이 감기에 걸려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일화를 보고는 감기만 걸리면 책을 찾곤 했던 나였으니, 이러한 가설에 새삼 고개가 끄덕인다.


    지금이야 정절에 지칠대로 지치고 성 관념에 닳고도 닳았지만, 치마가 살랑거리는 여름밤 거리 어딘가에서, 여자 동료들은 모두 귀가를 마친 3차, 4차 회식 술자리 어딘가에서, 내 마음 속 007 비디오와 세종대왕 위인전이 아웅다웅 하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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