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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5:00 새벽 어스름의 드라마 한 편에 대하여


A : 에이엠 다섯 시, 새벽 어스름에 드라마를 본 적이 있나?


B : 저는 아직 없는 것 같은데요.


A : 꼭 한 번 해보게. 바깥은 조용하고, 불빛은 파랗지. 형광등이나 스탠드 불빛 같은 그런 불빛이 아니야.

     자연의 빛을 말하고 있는 거네.


B : 그 시간에 자연은 어두컴컴할 텐데요. 가로등 불빛이 아닐까요?


A : 파란 불빛 아래 끝내주는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행복이 뭔지 느낄 수 있다네. 


B : 그 시간에 잠은 안 자시나요?


A : 잘 안 자지. 심야형 인간이라고 보면 되겠네. 아니, 아침형 인간에서 '아침'은 한자어가 아니라 

     순우리말이니 저녁형 인간 또는 새벽형 인간이라고 칭하는 게 더 맞겠군.


B : 그럼 언제쯤 주무시나요?


A : 드라마를 보고 나면 일곱여덟시쯤 되고, 일곱여덟시쯤이 되면 햇빛이 너무 밝아져서 잠이 들기 

     어렵지. 정말로 내가 하루 중에 가장 싫어하는 순간이야.


B : 잠들기 어렵겠군요. 그런데도 굳이 새벽에 드라마를 봐야 하나요?


A : 찰나의 순간이야. 그런 푸른 빛은 정말 찰나의 시간이야. 아까 가로등 빛이 아니냐고 물었지?

     가로등 불빛이 아니라 일출의 전조와 같은 거야. 그래서 더 아쉽고 소중하지.


B : 만약 저 같으면 정말로 견디기 어려울 것 같네요. 밤새 잠들지 않고 아침에 잠을 들다니. 


A : 나는 오래 전 부터 몸에 익은 시간이야. 그런데 자네 그거 아나? 나도 몹시 견디기 어려워.


B : 아까는 좋아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A : 아니, 견딜 수 없어 미칠 정도라네. 드라마 한 편이 끝나고 잠깐 담배를 피우곤 하지.

     그럴 때면 온갖 자괴감과 자책감이 몰려들어와. 새벽에만 만날 수 있는 악령들이지.


B : 뭔가 이해하기 어렵군요.


A : 이해하기 어려운 게 당연해. 왜냐하면 나도 이해하기 어렵거든. 

     새벽에 깨고 낮에 자는 생활은 열패감 그 자체야. 나는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미 지고 있는 거나 다름 없지. 아니,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미 지고 있는 거나 다름 없다고 

     느껴지지. 그러니 자네 같은 사람들은 행운인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길 수 있으니 말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단지 아침 8시에 일어나서 제 시간에 밥을 먹고 제 시간에 학교를 가고

     제 시간에 회사를 가고 제 시간에 사람들과 대화를 한다는 그 단순한 일상 만으로도,

     나 같은 사람들에게 이기고 있는거야. 


B :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은데요. 누군 일어나고 싶어서 일어나고, 

    회사에 가고 싶어서 회사를 가나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든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또다른 행복 아닐까요?


A : 그건 한 번도 이런 생활을 해본 적이 없는 자네 같은 애송이나 할 수 있는 말이야. 


B : 아니요, 저도 충분히 그런 생활을 해봤는데요. 그 때 만큼 행복한 시절이 또 올까 싶을 때도 있어요.


A : 닥치게나. 


B : 네?


A : 닥치라고. 


B : 아 네.


A : 자네가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감정으로 그런 생활을 했을지 물론 나도 쉽게 판단해서는 안되겠지. 

     하지만 모두에겐 각자의 사정과 사연이 있는 법이라고. 아침에 뜨는 햇빛을 가리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 때면난 마치 뱀파이어, 아니 우리식으로 그냥 산 송장이 된 기분이라고. 

     부모님은 건강히 잘 계시나?


B : 부모님이요? 무슨..


A : 우리 가족은 모두 부러졌네. 그렇게 쉽게 판단할 내용들이 아니야. 친구들을 못 본지도 몇 년이 

     지났어. 내가 정말로 사랑했던 여자는 나 같은 산 송장보다는 혈색 좋은 스태미너맨을 찾아갔지. 

     아, 드라마를 보는 중간 중간 가끔 성욕을 해결하곤 하는데 그 짓 또한 나를 미치게 하지. 


B : 잠시만요. 이야기가 좀 벗어나는데요. 제가 지금 이렇게 여쭤보는 이유는 


A : 닥치게나. 그딴 거 없다는 거 알고 있어.


B : 아니요, 그래도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A : 그래, 자네가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왔든 이렇게 나와 이야기해주는 것만으로도 난 고마워하고 있네. 

     그러니까 제발 닥치게나. 


B : 


A : 미안하네. 가끔은 내 인생이 이렇게 반토막이 나는 건 아닌가 두려울 때가 있어. 지금 이전의 순간과 

     지금 이후의 순간으로. 드라마를 다 보기 전과 다 보고 난 후로. 이전의 나는 참 맑고 활력이 있었지. 

     이후의 나를 상상할 수록 난 내 머리카락을 전부 삼키는 기분이 되곤 한다고. 심지어 드라마에 

     나오는 서양 남자를 질투하기도 하지. 뭔가 샤프하지만 그닥 신경쓰지 않은 듯 시크한 주름을

     가진 셔츠를 입고, 이유를 알 수 없게 매혹적인 대사들을 던지곤 하는 녀석들이지. 무엇보다 뭔가 

     열중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그 모습이 부러운거야. 외모가 부러운 게 아니라. 

     웃긴 건 그런 녀석들은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거지. 실체도 없는 녀석들을 부러워하고 있어. 

     이건 실제로 없는 여자와 섹스를 하고, 실제로 없는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 것과 똑같은 짓이라고. 

     내가 그렇다고. 


B : 어떻게보면 그 실체 없는 가상을 만들어낸 실체를 부러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A : 아니, 그딴 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네. 아까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에 조금도 관심없으면서, 

     억지로 비위 맞추고 있다는 거 알아. 매우 역겹네. 속으로는 이런 노땅 새끼 언제 말을 끝내나 싶겠지.

     그런 식으로 대충 비위 맞춰줄 바에는 차라리 열과 성을 다해 비위를 맞추라고.


B : 어제 차에 기름을 넣으려고 주유소를 갔었어요. 그런데 주유하는 기계 앞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나오지 않더라구요. 차 밖으로 나와서 사무실 쪽을 봤더니, 어떤 아저씨 혼자 서성거리는 게 

     아니겠어요? 알바라기보다는 사장처럼 보이는 사람이었어요. 다가가서 '주유 안 하시나요?'라고 

     여쭤봤더니, 이런저런 이유를 대가며 역겹게 비꼬더라구요. 요지는 그렇게 멀리 세우지 말고 가까이 

     세워야 주유소에 들어왔는지 안 들어왔는지 볼 수 있겠지 않냐는 거였고, 

    진짜 요지는 아 씨발 일하기 싫은데 왜 귀찮게와서 지랄이야 라는 거였죠. 그래서 땅바닥에 

    침을 퉤 뱉고는 안쪽 주유기 쪽으로 차를 옮겼어요. 그 사장인지 알바 나부랭이인지 모를 놈이 그래도

    돈은 벌어야겠으니 이 쪽으로 오더라고요. 바로 엑셀을 밟고 주유소를 박차고 나갔죠. 사무실에서 

    주유기까지 오는 그 몇 발걸음을 허비하게 만들어서 꼬셔죽는 줄 알았어요. 그리고는 유턴을 해서 

    바로 맞은 편에 있는 주유소로 갔죠. 왜 주유소는 항상 맞은 편에 거울처럼 있는 걸까요? 

    다행히 이 쪽 주유소 아저씨는 친절하더라구요. 기름을 넣으며 반대쪽 주유소를 봤어요. 

    이쪽을 보고 있는지 아닌지 확실히 보이진 않았지만 통쾌했어요. 

    씨-발.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A : 누군가 재미난 이야기를 내 눈 앞에서 해주는 게 참으로 오랜만이군. 허허. 


B : 아니 씨-발. 지금 내가 무슨 말하는지 알겠냐고요. 첫째는 지금 내 기분이 그 때 기분이랑 비슷하니 

     그만큼 당신이 엿 같은 이야기들을 나한테 지껄이고 있다는 거고, 둘째는 내가 당신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이제부터 당신이 말한대로 억지로 비위맞추지 않겠다는 소리란 거고, 

     셋째는 그러니 제발 우리가 원래 하기로 했던 이야기로 돌아가줬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A : 몰랐는데, 자네 성깔있는 친구군. 난 성깔에 약해. 그렇게 눈 부릅뜨지 말게나. 일단 물 한 잔 하게나. 

     아, 집에 믹스커피도 있고 쥬시쿨도 좀 남았는데, 어떤 걸로 하겠나?


B : 쥬시쿨이요.


A : 씨발, 잠깐만 기다리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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