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이지리아 소고


나는 눈치를 보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하고 싶은 말이라도 해선 안 될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말 하기 전에 생각을 하고 말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은 행동 하나도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여러 사건들이 있었지만, 곱씹어보면, 대학시절 한 아이를 만났던 때부터인 것 같다. 케잌을 몹시 좋아하던 그녀는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당시 그녀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 "남에게 피해끼치지 않는 삶"이었을 정도로) 너무나 착하고 여린 사람이었다. 매우 조용하고 말이 짧은 사람이었다. 웃음소리조차 없을 만큼 조용하고 얌전한, 고요한 사람이었다. 언젠가 왜 그렇게 조용하냐고 내가 묻자, 자신은 말을 하기 전에 무지하게 많은 필터링을 거친다고 했다.

그녀는 생각나는데로 온갖 개소리를 내뱉던 당시의 나와는 정반대의 인간이었다.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그 대화를 나눈 시점 이후로 내 안에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다. 나는 조금씩, 말을 하기 전에 생각을 하게 되었고,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하지 않는 경우가 잦았다. (이런 현상의 원인은 그날의 대화 이외에도, 내가 되도않은 개그를 칠 때 나오는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기가 민망해서이기도 하다) 나의 말하기 방법 또한 그녀를 닮아 점점 조심스러워지고 있었다.

이 블로그의 다른 주인인 나이 많은 형이 "김다래 재미없어졌어~"라고 말하기 시작한 시점또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사람이 23년간 살아온 방식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바뀌나 싶을 정도로, 당시의 나는,(사실은 굉장히 똑똑한) 그녀의 바보같이 해맑은 미소가 너무 좋았고, 그녀와 오래오래 잘 지내고 싶었던지, 다소 얌전한 인간이 되었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그 친구의 영향은 그래도 나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었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 기간동안 나 스스로의 변화, 즉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울 수 있게 된 것이 너무 재미있고, 좋았으므로. 

두 번째 시점은 아마 우리과 모 교수님의 사회학방법론 수업을 들으면서일 것이다. F를 받고, 재수강을 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드랍을 하고, 3수강만에 겨우 A0를 받은 그 수업이다. (끝까지 따라오기만 하면 왠만해선 A+를 주는 그 수업에서 A0를 받았다는 것은 내가 어지간히 논문을 못 썼다는 반증일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문제가 많은 논문이었다. 논리도 빈약하고, 무엇보다 통계의 통자도 모르면서 그럴싸해 보이게만 써놓았으니, 전문가인 교수님 입장에선 기가 차서 A0도 주기 아까웠을 것이다. 종강후 중전에서 몇날 며칠 밤 샌게 불쌍해서 그냥 옛다하고 A0를 주신게 아닐까...) 여하튼 그 수업에서 선생님께서 항상 하시던 말씀이 몇 가지 있었다.

"결론부터 말한 뒤 근거를 말하라. 청중은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다."
"왜 독자가 내 글을 읽어야 하는지를 알려줘라. 자신의 주장을 다각적으로 접근하라."
"Argument & Evidence, 주장이 없는 글은 재미가 없고, 근거가 없는 글은 위험하다." 

이 외에도 발표를 할 때 절대 "제가 발표를 잘 못해서..."라는 말로 시작하지 말라든가, 예행연습을 꼭 하라든가, 등, 진짜 도움이 되는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는 수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이런 가르침들 속에서 나는 어느새 '내 얘기는 재미가 없어서 듣고싶은 사람이 별로 없을거야.'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실제로 내가 맡은 연구 주제인 '한국사회의 건강불평등'은 재미가 없을 뿐더러, 내가 재밌게 꾸미지도 못했다. 그러니까 선생님의 좋은 가르침을 난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채 수업이 끝난 것이다. 

세 번째 시점은 취업준비시절인 듯하다. "상대방은 내 얘기를 듣고싶어 하지 않는다." 라는 명제가 아예 몸에 베게 된 시점이다. 각종 취업설명회, 취업캠프, 취업상담, 취업스터디 등에서 귀에 박히도록 들은 저 말은 나를 크게 바꿔놓았다. 

서류 광탈의 나날을 보내던 그 시기에, 하루는 인천의 두산 영감 방에 상담을 하러 간 적이 있다. 내 자소서를 읽어본 영감은 한숨을 푹 쉬었다. 난 나름 진실되게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곤 영감의 대대적인 자소서 구조조정(?)이 시작되었다. 영감은 상대방이 듣고싶어 하는 말을 하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내가 하고싶은 말이 아닌, 상대방이 듣고싶은 말을 써야 한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영감의 가르침을 받아 밤새 쓴 결과, 진실은 과장되고 단점은 줄어든, 매우 괜찮은(?) 자소서가 완성됐다.

나는 두산 영감 덕분에 취업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감이 없었으면 지금의 난 나이지리아에서 키보드를 뚜드리고 있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만큼 영감의 조언은 매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감과 여포년과 맛난 인천 족발을 먹은 그날 밤 이후로, 나는 자신감이 뚝- 떨어지고, 조금우울해졌다. 아니, 취업시장에 회의가 들었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만약 그런 회의감을 발전시켜 그대로 취업을 포기했다면, 난 지금처럼 눈치보는 재미없는 사람이 되진 않았을 지도 모른다. 어떤 동력에 이끌렸는지 몰라도, 나는 꽤 우울했던 그날 밤을 극복하고, 나름 열심히 취업준비를 하게 되었다. 자소서를 쓰고, 인적성을 치고, 면접을 보면서, 나는 "그렇게" 사는 법을 어느새 받아들인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을 하고 사는 것.

사회생활이 그런 것이라면, 사회생활이란 건 참 재미없는 생활인 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나의 첫 사회생활(알바제외) 이었던 회사 입문교육은 원래의 나를 지금의 재미없는 나로 완전히 바꿔놓았다. 즉, 회사 입문교육의 조활동이 바로 지금의 나를 만든 네 번째 사건인 것이다. 무난히 조용히 지나가면 될 것을, 튀고 싶은 기질이 남아있던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조모임에서 마구마구 무리수(?)를 던지고 말았다. 너무 조용한 조 분위기를 좀 띄우고 싶은 마음에 개소리를 던졌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뭐 이리 반응이 구린거지... 처음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다들 공대라서 그런가? 다들 남자라서 그런가? 다들 우리학교 학생이 아니라서 그런가? 내가 군대를 안 가서 그런가? 그러다가 그냥 내가 또라이였나보다 하고 결론을 내렸다. 또라이들하고만 6년째 놀다보니 내가 또라이라는 걸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내 또라이 친구들 같은 거라고 생각한 내가 잘못이었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정말 단순한 사실을 그 때서야 비로소 온 몸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이 외에도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컨설팅 인턴하면서 내가 쓴 글이 까이고 까이던 경험, 가정부한테 까이고 까이던 경험, 답답한 동기 형과의 관계 등등.

그러고 흘러흘러, 지금 나이지리아에서 난 무진장 눈치를 보는 신입사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신기한 일이다. 사람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구렁이 담 넘어가듯 변하기도 한다.

아무 눈치 보지 않고 깔깔깔 떠들 수 있는 또라이들이 그리운 밤이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이지리아 소고 4 : 가는 길  (5) 2013.09.09
아름다운 것 - 언니네 이발관  (0) 2013.05.16
나이지리아 소고 3  (1) 2012.09.16
나이지리아 소고 2 : 자기객관화  (2) 2012.01.14
나는 초대장을 원한다.  (1) 2010.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