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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싶은 글이 없다.

훈련소에 있을 때, 나를 신경 써 주던 많은 친구들이 편지를 보내주었다. 모두 답장을 하고 싶었다. 안녕을 묻고, 무얼 하며 지내는지 묻고, 내가 겪은 고생을 하소연하고, 내가 새롭게 갖게 된 고민을 나누고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편지를 쓰는게 너무 어려웠다.

매일 2시간 정도 자유시간이 주어졌고, 대부분은 집이나 친구들, 여자친구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 시간을 보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같은 시간동안 편지를 쓰고도 같은 양의 편지를 부치지는 못했다. 낮 동안 고된 훈련을 받는 동안 머리 속에는 편지를 어떻게 쓸지에 대한 고민 뿐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생각들을 정제해 문장으로 만들어 편지지 위에 옮기는 연습을 머리 속으로 수십번을 반복했다. 하지만 편지를 써야 할 때는 펜이 막히곤 했다. 고심고심하며 단어를 골라 편지지를 1~2장 쯤 채우다 보면 내 글이 점점 두서 없고 혼란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적어 놓은 개소리는 그냥 재미삼아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개소리처럼 느껴졌다. 늘어 놓은 문장들은 내 생각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 하고 핵심을 비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시간, 혹은 하루동안 고민했던 결과물은 미완성인 체로 폐기 된다. 편지 쓰는 데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소등 이후에도 화장실에서 편지를 썼다(화장실 칸에서 나오지 않는 나를 '걱정'해준 여러 불침번들에게 지금에 와서라도 사과하고 싶다). 결론은, 시간이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폐지가 좀 더 빠르게 만들어질 뿐이었다. 10장 쯤 쓰면 3장 쯤 부칠 수 있었다.

옆 자리의 어린 친구는 매일 여자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날마다 1~2장씩 편지를 써 부치는 걸 보면 부럽다는 생각 뿐이었다. 여자친구가 아니라, 쉽게 쉽게 쓴 편지가. 이쁜 사랑 하세요 쉽새끼들아. 반면 두달 가까운 훈련소 기간 중 발송한 내 편지는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었다. 편지가 그렇게 어려운 글은 아닐 텐데, 액자에 넣어 과방 벽에 걸어 둘 만한 명문을 쓰고 싶었던 것도 아닐 텐데, 이상하게 글을 쓰는 것이 어려웠다. 내게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C와 1주 1작문 약속을 했다. C는 글쓰기 싫어하는 내가 반발없이 받아들이자 신기해했다. 그 때 내게는 약간 의무감 비슷한 감정이 있었다. 글을 완성하기 어려워 하는 병은 어쩌면 더 심각해 졌고 여전히 글 쓰는 것을 싫어하지만,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그냥 흘러가다가는 평생 글을 못 쓸 것 같은 느낌. '그래, 하자'라고 쉽게 말했던 데에는 '쓰고 싶다'보다는 '써야 한다'라는 이유가 강했다. 하지만 역시 쓰고 싶은 글이 없었다.


글쓰기는 칼을 만드는 작업과 비슷해 보인다. 쓸만한 철을 구하고, 담금질 담금질 담금질, 원하는 칼의 모습에 따라 모양을 잡고, 날을 벼리고, 마감을 하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에게는. 각각의 과정을 내가 서로 어떻게 대응시키려고 하는지는 이 비유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비유를 마음에 들어하는 이유는 이 것이 내가 글을 못 쓰는 이유와 왠지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가 보더라도 그 예술성에 감탄을 할 만한 일본도를 만들고 싶어하는게 아닐까. 되든 안되는 이쁜 하몬도 넣고 싶고, 가슴이 섬뜩해 질 정도로 날카로운 날도 세우고 싶다. 유려한 곡선미로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싶다. 하지만 그런 칼을 만들어낼 경험과 능력이 있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저질 사철을 그러모아 불순물을 제하고 그럭저럭 쓸만한 철괴를 만드는 데에서 오는 어려움에 지레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머리 속에는 많은 생각들이 오가고 있지만, 그 중 하나를 붙잡고 거기에 대해 고민하고 글로 만들 수 있을 만한 덩어리로 키워내는 집중력을 잃은 시기부터, 고민을 하지 않고 살게 된 시점부터 글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글에 대한 기준이 높고 능력과의 괴리가 커 경험을 두려워하게 된 것과 별개로.

 

그래서 생각을 안하고 사는 게 문제라는 거야, 글쓰기에 스스로 세운 기준이 높아서 쓰기 두렵다는 게 문제라는 거야?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게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 그리고 전반부랑 후반부랑 글이 따로 놀잖아. 개요 안잡고 도입부부터 생각하고 글쓰기 하냐
음. 이게 문제다. 이게 제일 심각한 문제인 것 같다.
그래도 일단 쓰긴 썼다.


역시, 글쓰기가 싫을 때에는 왜 글이 쓰기 싫은 지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가장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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